플랫폼을 잠식하는 ‘AI Slop’의 실체
AI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고 빠르게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제 기계가 생성한 콘텐츠가 인터넷을 가득 채우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중에서도 AI로 만들어진 저품질의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디지털 콘텐츠, 이른바 ‘AI Slop’이 주요 플랫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AI Slop은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폭발하는 새로운 인터넷이 만들어지기 전,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의 확산, 창작 생태계의 붕괴, 플랫폼 전반의 신뢰도 하락을 초래하며 ‘인터넷을 죽이고 있다’는 비판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AI Slop은 문화적 농담이나 롤플레잉, 유희를 목적으로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탈리안 브레인롯(Italian Brainrot)’과는 성격이 다르다. AI Slop은 대부분 알고리즘을 겨냥해 설계된 조회수 확보용 콘텐츠이며, 자동 광고 수익을 노린 디지털 스팸에 가깝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튜브는 2025년 7월부터 반복적·대량 생산된 저품질 콘텐츠를 ‘진정성이 없는 콘텐츠’로 규정하고 수익화 대상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일부 채널에 대해서는 삭제 조치까지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구독자 200만 명 이상을 보유했던 ‘Screen Culture’ 채널도 삭제 대상에 포함됐다. 해당 채널은 AI로 생성한 가짜 영화 예고편을 수십 개의 버전으로 업로드하며 알고리즘을 악용했고, 수익 창출이 차단된 이후에도 제목과 문구를 바꿔 다시 수익화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채널이 정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AI Slop은 여전히 추천 알고리즘을 타고 유통되며 높은 조회수와 광고 수익을 만들어내고 있다. 글로벌 온라인 영상 편집 플랫폼 Kapwing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AI Slop 소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이즈 속에서 기회를 찾는 브랜드들
이처럼 인터넷이 노이즈로 가득 찬 환경이 되었을 때, 일부 브랜드는 AI Slop 자체를 마케팅 소재로 활용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미국의 고급 피트니스 브랜드 Equinox는 2026 신년 캠페인에서 의도적으로 기묘하고 AI 생성 이미지에 가까운 비주얼을 사용했다. 유명 인물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장면들을 제시한 뒤, “Question Everything But Yourself(자기 자신만은 의심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역설적인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했다. AI Slop과 유사한 감성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피로감 자체를 메시지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화제성과 브랜딩 모두를 확보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세계 최대 아몬드 전문 기업 Blue Diamond Growers의 Almond Breeze 광고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이 광고는 미국 인기 밴드 Jonas Brothers를 등장시켜, 광고 속 가상의 에이전트들이 조악한 AI 광고 아이디어를 계속 제안하는 설정으로 전개된다. 우주에서 떠다니거나, 과도하게 과장된 연출을 요구하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결국 이들은 그런 연출 대신 “Almond Breeze ? Really Good(정말 맛있다)”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선택한다. 광고는 진짜 사람의 감각과 진정성, 인간적인 연결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유머로 풀어내며, AI Slop에 대한 피로감을 브랜드 호감도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모든 마케팅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AI Slop이 반드시 배제해야 할 대상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한다. 알고리즘을 겨냥해 만들어진 AI Slop 속에는 초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표현들이 섞여 있으며, 이는 르네상스 이전의 낙서처럼 원초적인 시각적 끌림을 만들어낸다.
AI Slop 이후, 콘텐츠는 어디로 향하는가
한편 AI 생성 모델의 발전으로 가벼운 콘텐츠의 생산 속도는 점점 실시간에 가까워지고 있고, 결과물의 기괴함은 점차 희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콘텐츠 창작의 주도권을 브랜드가 아닌 사용자에게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디어가 손쉽게 시각화되고, 감정과 경험 또한 빠르게 표현될 수 있다면, 적절한 기획과 환경만 제공해도 사용자와 브랜드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생성된 콘텐츠 자체가 다시 마케팅 자산이 되는 순환 구조도 만들어질 수 있다. 기획자의 세심한 설계를 통해 무분별한 AI Slop은 사용자 고유의 ‘AI Story’로 전환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AI Slop의 과도기가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결국 인터넷은 다시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 영상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이 올린 영상에 좋아요와 댓글이 달리는 구조가 아니라, 사용자들이 각자 생성한 개성 있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적 콘텐츠를 이루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다.
AI가 만들어낸 혼란의 시기를 지나, 다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콘텐츠의 형태 또한 새로운 진화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