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전, 대학로에서 무용공연을 보았다. 작은 소극장이었고, 내 눈 바로 앞에서 건강하게 훈련된 몸을 가진 무용수들이 맨발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몸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언어로 말했고, 그들의 몸이 말하는 이야기가 내 귀에(눈이 아니라)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면서도 또렷하게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했다. 나는 주로 텍스트와 이미지로 이야기하고 있으며(당신도 그럴 테지만), 이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단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글을 쓰고 읽으면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왔고, 나이를 먹어서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두 개의 장치를 작동시키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텍스트와 이미지는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의 기준이 되었다. 그 기준 안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 혹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면서 말이다.

 
 

이미지와 텍스트. 전부일까? 진실할까?

이사도라 던컨이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섰던 날, 수천 년 간 규칙의 상자에 갇혀있던 ‘춤’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가공의 규칙을 여전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사도라 던컨과 그녀가 해방시킨 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사도라 던컨은 몸으로 춤을 출 뿐인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는 ‘공산주의자, 천박한 댄서, 몸을 파는 매춘부’ 같은 것이었고, 사진 속 이미지는 그런 텍스트를 보조했다. “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라고 던컨이 몸으로 말했던 절규의 언어조차 텍스트는 의미를 부여하며 훼손시켰으며, 그녀의 최후는 오픈카를 타고 가다가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끼어 목이 졸려 숨지는 이미지였다. 이쯤 되면 이사도라 던컨의 진짜 살인자는 텍스트와 이미지였다.

난 왜, 우리는 왜 텍스트와 이미지를 추종하는가? 답은 쉽다. 몸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그 몸의 언어가 나이를 먹으며 퇴화했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훈련하면서 진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라는 원시적 언어를 말할 수 없으니까, 말할 줄 모르니까, 우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오호 통재라!